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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는 기억하고 나는 잊는다.

by 잇슈17 2025. 6. 13.

우리는 쉽게 잊는다. 하지만 내가 남긴 데이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과 기록이 달라진 시대, 그 차이에서 오는 혼란을 마주하게 된다.

데이터는 기억하고 나는 잊는다.
데이터는 기억하고 나는 잊는다.

1. 나는 잊고 싶은데 기계는 끝까지 기억한다.

문득 오래된 사진이나 메신저 기록을 다시 열어볼 때가 있다.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인데, 파일 하나만으로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예전에는 기억이라는 게 사람의 뇌에만 남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결국은 사라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 클라우드, 메신저, SNS... 내가 한 말, 찍은 사진, 검색한 기록까지 거의 모든 순간이 기록되고 있다.

놀라운 건 이 기록들이 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저장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뭘 눌렀는지, 언제 로그인했는지, 어느 위치에서 무슨 앱을 열었는지 같은 정보까지 남는다.

한참 전에 끝난 연애가 있었다.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다시는 그 사람과 관련된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연락도 끊었고 사진도 다 지웠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카카오톡을 새 폰에 복구했는데 그 사람이랑 나눴던 오래된 대화들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심지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이모티콘을 썼는지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순간의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아 맞다, 이런 말도 했었지…’
‘이건 왜 이렇게까지 말했을까…’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마치 타임머신처럼 날 끌고 갔다.

이 경험을 하고 나서 알게 됐다.
나는 감정적으로 벗어났지만 기계는 벗어나지 않았다.
삭제하지 않는 이상 데이터는 나보다 더 끈질기게 그 기억을 붙잡고 있는 거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내가 어떤 사람과 나눴던 말, 어떤 주제로 밤새 검색했는지, 감정적으로 보냈던 메시지까지, 대부분은 나조차 잊고 살지만 데이터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 지우지 않는 이상 혹은 일부러 파기하지 않는 이상, 이 기록들은 언제든 다시 떠오를 수 있는 디지털의 기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건 때때로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나를 다시 만나게 만든다.

 

2. 기억과 기록은 다르다. 디지털 시대의 기억 방식

우리는 종종 ‘기억’과 ‘기록’을 같은 말로 여긴다. 하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기억은 주관적이고, 변형 가능하며, 흐릿해질 수 있다.
기록은 객관적이고, 고정되며, 삭제하기 전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직접 기억해야만 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은 일기로 남기거나, 누군가에게 말로 전해져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정보가 자동으로 저장된다. 내가 기억하지 않아도, 나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저장하고 있는 것이 클라우드와 서버다.

예를 들어, 과거 연인과 나눴던 메시지, 내가 처음 쓴 블로그 글, 7년 전의 인스타그램 사진. 나는 잊고 있었지만 플랫폼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서 ‘접속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어떤 장면이 떠오르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 떠올리기보다는 검색하거나 백업 폴더를 뒤져본다. 기억은 이제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 어딘가에 저장돼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 디지털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는 것이다. 잊고 싶은 과거, 부끄러운 실수, 이미 끝난 관계조차도 다시 호출되면 현재의 감정과 충돌을 일으킨다. 감정은 잊었는데 데이터는 잊지 않는다.

 

3. 기억을 잊는 기술은 왜 없는가?

우리는 데이터 저장 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왔다. 저장 공간은 커지고, 속도는 빨라지고, 보존 기간은 길어졌다. 그런데 그에 비해 잊는 기술은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

물론 삭제 기능은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내가 뭘 기억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 있다.
예전 카카오톡 백업을 복구하다 보면 “이런 대화를 내가 했었나?” 싶을 때가 있다. 심지어 그 대화를 주고받았던 사람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나는 나의 과거를 내 손으로 정리하지 못한 채, 그저 기술이 남긴 기록에 의존하게 된다.

그 결과, 잊는 힘이 점점 약해진다.
과거의 감정이나 실수, 좋았던 순간들까지도 자주 떠오르게 되면, 현재에 집중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더 나아가면, 기록된 데이터가 나의 정체성을 대신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기억하는 나보다, 남아 있는 데이터 속의 내가 더 생생하니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상상이 든다.
“나만 볼 수 있는 기억 정리 시스템이 있다면 어땠을까?”
자동 백업 대신 자동 삭제 기능이 있고, 감정적으로 민감했던 순간을 스스로 정리해서 보관하거나 잊을 수 있게 도와주는 기술이 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가볍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데이터는 나를 따라다니며 저장되고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장면들, 그 말들, 그 검색 기록들.
기계는 잊지 않지만, 나는 잊고 산다.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잊는 존재다. 인간의 뇌는 필요 없는 기억을 지우거나 희미하게 만들도록 진화해왔다. 감정적으로 복잡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실수나 상처도 결국 희미해지곤 한다. 그래서 잊는다는 건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적 정리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억은 사라져도 데이터는 남는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언제든 다시 호출될 수 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플랫폼이나 서비스는 기억 상자를 다시 열어 나에게 보여준다.

문제는 그 정보가 진짜 ‘나’를 대표하게 된다는 점이다.
알고리즘은 내가 클릭한 것, 좋아요를 누른 것, 자주 본 콘텐츠를 기준으로 나를 분석하고 정의한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나’, 혹은 ‘충동적인 나’일 수도 있다. 내가 어떤 감정 상태였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까지는 데이터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끔은 의도적으로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클라우드 앨범을 열어 한 번쯤 지우거나 보관할 것을 정리해보는 것, 오래된 채팅 백업을 정리하거나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과거의 흔적들을 스스로 정리해보는 것.
잊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일부러라도 잊는 연습을 해보는 일 말이다.

기계는 기억하지만 나는 잊는다.
그 차이를 인식하고 주도권을 되찾는 것, 어쩌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자율성이 그 지점에 있을지도 모른다.